오리아나 팔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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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운명을 이끌어 온 사람들이
범인과 다른 점은

그들의 지성도,
힘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상도 아니며

오직 보다 원대한 야망하나
뿐이다.


- 오리아나 팔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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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오리아나 팔라치

최초의 종군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에게 인터뷰는 전쟁이다. 여성 인권에 대해 호메이니와 말다툼을 벌이던 팔라치는 결국 차도르를 ‘고리타분한 걸레조각’에 비유하며 벗어 던져버렸다. 헨리 키신저, 휴 헤프너, 페데리코 펠리니, 카다피도 팔라치의 대담한 도발과 냉철한 공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리엘 샤론은 1982년 베이루트 폭격 때 사망한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이미는 팔라치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펜을 화살로, 기사를 과녁판으로 삼아 인터뷰에 임한 팔라치에게 사랑은 전쟁터에서 찾아왔다. 그리스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혁명가 알렉코스 파나고울리스와 팔라치는 인터뷰 자리에서 처음 만나 바로 사랑에 빠졌다. 파나고울리스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팔라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팔라치도 9살 연하의 혁명가가 뿜어내는 신념과 열정에 반한 상태였다. 팔라치의 소설 제목인 ‘인샬라(신의 뜻대로, 혹은 운명)’ 같은 시작이었다.

팔라치는 사랑 때문에 일을 포기하는 전통적 여성이 아니다. 그러나 파나고울리스와 열애에 빠졌을 때만은 예외였다. 팔라치는 훗날 “알렉코스와 사귈 때를 빼면 나는 어머니에게 했던 소리없는 약속, 사회적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맹세를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시인이기도 한 파나고울리스는 팔라치의 작품 두 곳에 흔적을 남긴다. 소설 ‘태어나지 않은 아기에게 보내는 편지’ 원고를 본 파나고울리스는 몇 가지 조언을 했다. 팔라치가 격분하자, 파나고울리스는 “당신을 위해 아주 아름다운 선물, 시 한 편을 준비했다”며 연인을 설득해 책 마지막 문장을 바꿨다.

파나고울리스는 수상쩍은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팔라치는 연인의 영전에 바칠 꽃으로 소설을 택했다. ‘한 남자’는 둘의 사랑과 용감한 혁명가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으며 파나고울리스의 죽음에 버티고 선 배후를 추적한 저작이다. 이 책에서 팔라치는 파나고울리스를 죽음에 몰아넣은 세력으로 그리스 민간정부를 지목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어 연인의 억울함을 완전히 풀어주진 못했다.

16살 때 언론계에 입문한 팔라치는 저돌적인 인터뷰와 뛰어난 문체로 명성을 날렸다. 몸을 사리지 않고 헝가리 민중봉기, 베트남 전쟁, 멕시코시티 대학살 현장을 누빈 용감한 모습은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작가로도 활약했다. 팔라치는 펜으로 유명해졌고,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했다. 3년 동안 집필한 ‘한 남자’에서 파나고울리스는 팔라치의 완벽한 이상형이자 만인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는 패배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 대신 말할 것이다”는 팔라치의 말처럼, 이 사랑은 위대한 기자가 정말 보도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사건일지도 모른다.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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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아나 팔라치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가 한 외국 여기자와 인터뷰했을 때 일이다. 기자는 1달러를 구걸하느라 아우성치는 국민의 비참한 생활, 황제 보좌관이 쿠데타를 시도했던 사건처럼 껄끄러운 질문부터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화를 내며 화제를 돌리던 황제는 결국 폭발했다. “이 여자 누구야? 어디서 온 여자야? 꺼져. 이제 끝이야!” 그 여자는 오리아나 팔라치였다.

▶이란혁명 직후인 1979년 팔라치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를 만났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를 따지면서 도발적으로 물었다. “차도르를 입고 어떻게 수영을 합니까.” 호메이니는 “당신이 상관할 바 아니다. 이슬람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지 않으면 된다”고 되받았다. 팔라치는 “그렇다면 이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걸레조각을 당장 벗겠다”며 예의상 입었던 차도르를 벗어 던졌다. 격분한 호메이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팔라치는 헨리 키신저를 만나서는 느닷없이 “대통령보다 큰 명성과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뭔가요”라며 슬쩍 비위를 맞췄다. 키신저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중요한 건 내가 항상 혼자 행동한다는 겁니다. 미국인은 말 타고 혼자 맨 앞에 서서 마차행렬을 이끄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말을 두고 “대통령도 무시하고 혼자 잘난 척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키신저는 “팔라치를 만난 것이 평생 가장 멍청한 일이었다”고 후회했다.

▶팔라치는 누구를 만나든 당당하고 거침 없고 공격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터뷰 모음집 서문에 “나는 수천 가지 분노를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그 수천 가지 분노는 수천 개 질문이 되어 내가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기 전에 먼저 나를 공격했다”고 썼다. 미리 꼼꼼하게 준비를 쌓아 스스로 확신을 갖고 인터뷰 상대를 치고 들어갔다는 뜻이다.

▶팔라치의 혹독한 질문을 겁내 인터뷰 요청을 거부하는 정치가가 잇따랐다. 대신 팔라치 스스로가 인터뷰 대상이 됐다. 그녀는 베트남과 중동을 누빈 종군기자이자 ‘한 남자’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나는 내가 쓴 글처럼 산다. 나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고 했던 팔라치가 암으로 떠났다. 그녀에겐 흔히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수식어가 붙는다. 사람들은 그녀의 삶을 신비롭게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를 내내 빛낸 것은 권위에 몸사리지 않고 위선을 벗겨내던 용기였다.

(김기천 논설위원 [ kc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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