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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美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 조작과 판박이"

[기고] 제3의 독립 기관의 진상 조사가 필요한 이유


기사입력 2010-06-09 오전 9:44:21

 

 

천안함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났다. 이미 6·2 지방선거도 지난 마당에 무리하게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발표해야 했던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동기도 소진되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가스터빈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부족한 증거를 근거로 여당의 북풍 선거에 때맞춰 북한 어뢰 공격설을 발표한 군 당국과 이를 검증없이 기정사실화해온 일부 언론에게 무언가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부터 진짜 문제는 이들을 제외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민관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어떻게 검증하느냐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989년 미국 해군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와 그 조사 과정을 소개하면서 군 당국의 자체 조사가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군 당국의 조사 결과에 대한 체계적 검증 시스템의 구축 필요성을 제기한다.

레이건의 '600-Ship Navy' 정책과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

이야기는 베트남전 이후 감축된 미 해군의 함대를 대폭 증강시켜 구소련과의 대결 구도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갖겠다는 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600 전함 해군(600-Ship Navy)' 정책에서 시작된다. '600 전함 해군' 정책의 핵심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에도 참전했다가 퇴역한 아이오와급 전함의 재취역, 노후한 군함의 수명 연장, 신규 대형 전함 건조 등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레이건 행정부가 표방해온 공공 예산 대폭 삭감 정책으로 예산은 부족하고 짧은 시간 내 퇴역한 노후 전함을 무리하게 재취역시키면서 도처에서 문제가 일어난다. '600 전함 해군' 정책의 상징이기도 한 아이오와호의 재취역은 역설적으로 1989년 4월 19일 47명의 선원이 사망하는 폭발 사고로 이 정책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다.

아이오와호는 1984년 4월 예정 계획보다 1년 앞당겨 재취역되지만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미 해군 정비감사위원회(InSurv)의 심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규정된 심사 기간을 한참 넘긴 1986년 3월의 재심사에서도 실격 판정을 받는다. 규정 최고 항속인 33노트에 이르지 못했으며, 16인치 함포 세 대 모두에서 유압유가 누설했으며, 함포윤활유로 선저폐수관이 침식되었고, 각종 전선은 잦은 정전을 일으키는 등 수많은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급기야 정비감사위원회(InSurv)는 해군 당국에 아이오와호의 즉각적인 퇴역을 권고하지만 '600 전함 해군' 정책을 신봉하던 해군은 권고를 거부하고 아이오와호의 설비 보수를 명령한다.

그 뒤에도 아이오와호는 정비감사위원회의 심사에서 또 한 차례 실격판정을 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심사를 통과하여 페르시아만에 배치되었다가 1988년 보수 점검을 위해 노포크(Norfolk)로 회항한다. 이 때 아이오와호는 펜타곤과 직접적인 친분이 있는 야심찬 신임 함장을 맞게 된다. 신임 무솔리(Fred Moosally) 함장은 취임하자마자 예정되어있던 보수 점검 계획을 송두리째 취소시키고 대신 예산을 전함의 발전기 보수로 전환시킨다. 예정되었다 취소된 보수 점검 대상 설비는 함포의 전기 시설, 장약 운반 시설, 유압시스템 등 총 75가지에 이른다.

결국 그 뒤 아이오와호는 이듬해인 1989년 1월까지 함포에서 끊임없는 설비 오작동과 보수 점검 문제로 거의 훈련을 하지 못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신임 함장과 함께 새로 배치된 젊은 장교들은 4월에 예정된 제2함대 훈련을 앞두고 성과주의에 목말라 함포의 사정 거리를 늘리기 위해 해군무기체계사령부의 규정된 절차를 무시하고 장약 개수와 포탄 중량을 변형하여 사격 훈련에 사용하기 시작한다.

경험 많은 함포 담당 부사관은 안전을 우려하여 상급 장교에게 항의하지만 모두 묵살당하고 이러한 무리한 훈련은 지속된다. 그러던 중 아이오와호는 4월 17일부터 푸에르토리코 인근에서 실시되는 미해군 제2함대 해상훈련 'FLEETEX 3-89'에서 제2함대사령관 존슨(Jerome Johnson) 중장의 기함으로 참여하게 된다.

드디어 문제의 4월 19일 오전 9시 30분경 제2함대 사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오와호의 함포 사격 훈련이 시작된다. 함장은 제1포탑의 장전과 사격을 명령했으나 불발된다. 규정상 불발탄이 발생했을 경우 사격을 중단하고 불발탄을 꺼내야 하지만, 함장은 이를 생략하고 곧바로 제2포탑에 포탄 장전과 사격을 명령한다.

제2포탑의 좌현포와 우현포는 내선을 통해 장전 완료를 알려왔지만, 중앙포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라는 보고가 반복된다. 잠시 후 중앙포를 바라보던 제2포탑의 부사관으로부터 "장약에서 연기가 난다!", "맙소사, 화염이야"라는 소리가 내선으로 전달된다.

1989년 4월 19일 오전 9시 53분, 함장의 장전 명령이 내려지고 나서 81초 후 제2포탑의 중앙포는 폭발하게 된다. 중앙포의 닫혀지 않은 포미에서는 섭씨 1400~1600도의 화염이 포탑 전체로 퍼져 포탑 내에 있던 다른 장약의 연쇄 폭발을 일으킨다. 화염은 다시 장약의 폴리우레탄 포장재를 태워 유독가스를 만들어내고 제2포탑 내에 있던 47명의 선원들은 폭발에 의한 직접적 충격이나 질식으로 사망하게 된다.






▲ 1989년 4월 19일 아이오와호 제2포탑 폭발 사고 장면. ⓒmaritimequest.com

해군조사단의 활동과 증거 인멸 및 왜곡

다음날 사망자들은 헬기로 인근 푸에르토리코 루스벨트 로드 해군 기지로 이송되고, 함장의 지시로 제2포탑은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도록" 청소된다. 제2포탑의 잔해물과 훼손 설비들은 아무런 기록없이 무단으로 해양에 투척되었고 제2포탑 내부는 새로이 페인트칠된다. 또 당시 인근 코랄 시(Coral Sea)호에 승선해있던 해군수사국(NCIS의 전신) 관계자들은 아이오와호 함장에게 공식적 조사를 요청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함장으로부터 사건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 대신 해군은 리처드 밀리건 중장을 단장으로 한 자체 조사단을 구성하고, 조사단은 사고 다음날인 20일 아이오와호에 승선하여 곧바로 생존한 선원들에 대해 취조에 들어간다. 마이어(Dan Meyer) 소위 등 취조 받던 장교와 부사관은 그동안 아이오와호에서 진행되던 변형된 형태의 장약 사용 훈련에 대해 증언하지만 곧바로 취조 담당 장교로부터 증언과 관련 속기록이 제지되고 이에 대해 함구할 것을 지시받는다.

사고 후 한참 뒤에 알려진 일이지만 조사단에는 당시 미 해군무기체계사령부에서 아이오와호에도 공급된 장약포장재를 기존의 실크에서 폴리우레탄으로 임의 변경시켜 사고 피해 악화에 일조한 장본인인 미첼리(Dominick Miceli) 대위가 기술조사단장으로 참여해 있었다.

해군조사단은 사망 선원 중 2년 전 동성애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하트윅(Clayton Hartwig) 병장이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인지한 후, 그의 시신 발견 위치에 대한 동료 선원의 증언록까지 바꿔치기 하면서 폭발 사고의 용의자로 둔갑시킨다. 마이어 소위는 다른 두 명의 선원과 함께 포탄 및 장약 장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포탑 아래층에서 하트윅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했지만 1년여에 걸친 유족들의 설득으로 양심선언을 할 때까지 이 사실에 대해 함구한다.

또 조사가 한창이던 5월에는 NBC에 하트윅 병장이 동성애 관계에 있던 동료 선원이 결혼 소식을 알리자 이에 앙심을 품고 기폭 장치를 함포에 설치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의 조사 파일을 통째로 넘긴다. 결국 5월24일 NBC는 이 내용을 독점 방송하고 다음날 미국 전역의 일간지들은 다시 이를 받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하트윅의 자폭 테러설은 거의 기정사실화된다.

연이어 5월 25일 해군조사단은 하트윅의 친구인 스미스 일등병을 최조실로 소환해 약 8시간동안 하트윅이 함포를 폭발시켰다고 진술하지 않으면 공범죄, 위증죄를 적용시키겠다고 협박한다. 스미스가 이에 불응하자 조사단은 아이오와호에서 9시간 동안 보호 관찰을 받게 한다.

스미스는 다시 취조실로 불려가 6시간동안 똑같은 협박을 받고 결국 하트윅이 동성애자이며, 전자 기폭 장치를 보여주었고, 함포 폭발 계획을 말한 적이 있다는 거짓 진술을 한다. 스미스는 사흘 뒤 해군수사국에서 열린 진술 녹취록 재확인 과정에서 모든 진술 내용을 번복하지만 해군조사단은 스미스의 초기 진술내용만을 다시 언론에 흘린다.

이어서 해군조사단은 6월 14일 스미스의 진술 번복 사실은 숨긴 채, 초기 진술 내용만을 FBI 행동분석팀(BAU)에 제공한 후 하트윅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의뢰한다. FBI 측은 주어진 스미스의 초기 진술 녹취록을 토대로 하트윅이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자폭을 한 것이며 이를 사고로 위장하려 했다는 15쪽 분량의 사망 원인 분석 보고서를 해군 측에 제출한다.

또 해군조사단은 하트윅이 전자 기폭 장치를 사용하여 포탄 장약을 폭발시켰다는 방침을 정한 뒤 FBI 연구소 과학분석팀(SAS)에 포탄 잔해물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다. 그러나 FBI 연구소는 해군이 전달한 잔해물에서 전자 기폭 장치 관련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실험결과를 통보한다. 그러자 해군조사단은 곧바로 FBI 과학분석팀에 대한 협조요청을 취소하고 이 사실을 조사결과보고서에서 제외시킨다.

결국 해군조사단은 9월 7일 국무부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아이오와호 폭발사건은 자살 충동을 갖고 있던 하트윅 병장이 의도적으로 전자 기폭 장치를 장약 사이에 삽입하여 사고를 일으켰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해군조사단이 강조한 가장 유력한 증거는, FBI가 기폭 장치의 증거물로서 동의하지 않은, 포탄 잔해물의 알루미늄, 칼슘, 염소, 글리콜 성분의 이물질과 하트윅의 소지품중 군사 마니아들이 즐겨볼 법한 두 권의 폭탄 설치 가이드북이었다.







▲ 미 해군 당국의 주요 증거 인멸 및 조작. (출처 : 미상원군사위원회 청문회(1989, 1990), 리처드 슈어벨(2001), 찰스 톰슨(2003)). ⓒ프레시안

미국 상원의 청문회와 샌디아 연구소의 해군 조사 결과 검증 활동

그러나 해군조사단의 발표에 대해 유가족 대부분은 동의하지 않았고 사고 희생자가 사고 전에 가족에게 아이오와호의 위험한 함포 사격 훈련과 장약 사용 관행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을 언론에 제기하였다.

언론 역시 해군조사단의 발표를 그대로 기사화한 <워싱턴포스트>를 제외하고는 <뉴욕타임스>, AP, ABC, CBS 등 대부분 아이오와호가 사고 당시 규정을 위반한 장약을 사용하고 있었고, 해군조사단에 사고 관련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제출된 증거들이 하트윅이 폭발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불충분하다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이와 함께 미 상원과 하원에서도 해군 당국의 조사 결과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면서 청문회를 개최한다. 먼저 전직 미 해병대 항공기 조종사 출신인 존 글렌 민주당 상원의원은 동료의원과 함께 상원 군사위원회의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에 대한 청문회를 주최(11월 16일)함과 동시에 미국 회계감사원(GAO)에 해군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대해 심의할 것을 요청한다. 이어 하원 군사위원회도 해군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대해 청문회를 주최한다. 회계감사원 측은 다시 기술적인 감사를 위해 미국 에너지부(DOE) 소속 샌디아 국립연구소(Sandia National Laboratory)에 조사 참여를 요청한다.

미 상원과 회계감사원의 요청에 따라 샌디아 연구소 측은 12월 7일, 30년 경력의 물리학자 리처드 슈워벨(Richard Schwoebel) 단장을 필두로 하나의 자문단과 네 개의 기술팀(화학 분석, 폭발물 연구, 모델링, 결함수 분석) 등 40명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을 구성한다. 이듬해인 1990년 1월 16일 샌디아 조사단은 먼저 해군조사단에 대한 면담을 통해 조사과정의 타당성을 검토하면서 장약이 장전 과정에서 마찰이나 정전기를 통해 자체적으로 점화될 수 있다는 단서를 얻는다. 해군조사단의 미첼리 기술조사단장은 이런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일축하였으나 이후 샌디아 조사단은 절반 수준으로 축소된 규모의 장약 낙하 실험을 통해 장약을 과도한 속도로 장전할 경우 점화될 수 있다는 결과를 도출한다.

샌디아 조사단은 이러한 자체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해군조사단에게 실제 규모의 낙하 실험을 통해 장약의 자체 점화 가능성을 입증해달라는 요청을 하지만 해군조사단은 이를 거부한다. 샌디아 조사단은 해군조사단이 거듭된 요청을 거부하자 상원 군사위원회 넌(Sam Nunn) 위원장을 통해 가까스로 해군조사단의 협조를 얻어낸다. 결국 1990년 5월 24일 샌디아 조사단이 입회한 가운데 해군의 달그렌(Dahlgren) 무기체계사령부 연구 시설에서 아이오와호에서 사용하는 실제 규모의 장약으로 낙하 실험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샌디아 조사단과 해군조사단은 18번째 낙하 실험에서 강철로 만들어진 주변 장비를 모두 파괴할 정도로 엄청난 폭발과 화염을 목격한다. 양측 조사단은 포탄 장약 사이에 설치한 센서를 통해 낙하 충돌 후 불과 수 밀리 초 만에 5개의 장약들 중 맨 아래 장약들 사이에서 화약 입자들이 점화되었고 이것이 폭발의 원인임을 확인하였다. 해군은 즉시 아이오와호급 전함에서 사용되는 모든 16인치 함포의 사용을 중단시켰고 제2차 해군조사단을 구성하게 된다.







▲ 아이오와호 폭발사고의 발단인 장약 점화 과정에 대한 개념도. (출처 : Garzke and Dulin (1995), <Battleships>, 228쪽). ⓒ프레시안

샌디아 조사단은 그 다음날인 5월 25일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두하여 아이오와호의 폭발 사고에서 해군 측이 제기한 화학 기폭 장치에 의한 폭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인적 실수나 설비 오류에서 기인한 포탄 장약의 과도 장전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한다. 이에 상원 군사위원회는 해군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신뢰할 만한 증거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으며 조사 방식이 전반적으로 의심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연이어 동 위원회에는 회계감사원이 출두하여 아이오와호급 전함의 훈련된 함포 인력이 다른 전함들에 비해 부족하며 설비 노후로 인해 퇴역이 권고된다는 증언을 한다.

상원 청문회 이후 해군 측은 1990년 6월 제2차 조사를 착수했고 17개월 후인 1991년 10월 17일 재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해군은 결과 발표에서 하트윅의 의도적인 행위가 폭발 원인이라는 1차 조사 결론은 잘못 도출되었다고 시인하고 유가족에 유감을 표시한다. 그럼에도 해군은 샌디아 조사단이 제기한 인적 및 기계적 결함에 의한 폭발론에 대해서는 끝까지 부정하면서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 조사 관련 주요 일지 및 기관별 입장. ⓒ프레시안

아이오와호 사례가 천안함 사태에 전해주는 시사점

아이오와호 사례는 ①대폭적인 공공 지출 삭감에 따른 부실한 전함 보수 점검, ②해군 증강 정책에 따른 노후 전함의 무리한 재취역, ③대규모 훈련을 앞두고 안전규정을 무시한 함포 사격 훈련, ④사고 후 포탑 잔해물의 무단 투기 등 증거물 은폐, ⑤용의자를 지정해놓고 시신 발견 위치까지 날조하며 짜 맞추기식 조사, ⑥FBI를 통한 과학적 검증 과정에서 왜곡된 정보 전달과 불리한 검증 결과의 은폐, ⑦동성애 혐오 이데올로기 선동 등 사고의 원인이 될 만한 문제점부터 이를 은폐하기 위한 군 당국의 조사 과정 왜곡까지 잘 보여주고 있다.

샌디아 조사단의 슈워벨 단장은 이후 아이오와호 사고에 대한 그의 1999년(2001년 재출판) 저서에서 ①중대 사건 사고의 경우 해당 기관의 자체 조사보다 독립 기관에 의한 조사의 필요성, ②조사 중간 해군 측의 의도적인 언론 유포에 의한 조작의 문제점, ③해군이 흘린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언론의 맹목적인 기사화 관행의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세계 최강의 해군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비용 절감을 위한 안전 지침 위반, 설비 관리 부실, 이의 은폐를 위한 동성애 혐오 이데올로기 선동 등 국내에서도 군 자체 조사단이 가질 수 있는 맹점을 짐작케 한다.

물론 민군합동조사단에는 군 당국 외에도 해외 전문가와 국내 민간인도 참여했으나, 미 해군 조사단이 FBI 측에 조사를 의뢰할 때와 조사 결과를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모습에서 조사단 내에서 정보 교환시 의도적인 왜곡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조사단에 참여한 국내 민간 전문가의 경우 상당수 해군 산하 연구소거나 해군의 무기 획득 계약에 관여하는 이해당사자임을 감안할 때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

또 미 해군의 경우 자체적인 1차 조사에만 최소 3개월이 소요되었고 독립기관인 샌디아 연구소의 조사에 다시 6개월, 해군의 재조사에 다시 17개월이 소요되었다. 반면 천안함의 경우 인양 후 실제 조사에 불과 1개월 남짓 소요되었고 결정적인 증거물인 가스터빈실에 대한 검토는 생략된 채 조사 결과가 발표되어 내용의 부실함은 물론 지방선거를 겨냥한 왜곡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내 다수의 언론이 자체 검증 과정없이 맹목적으로 군 당국의 조사 결과를 기사화하고 한술 더 떠 '전쟁 불사론'까지 외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심각한 문제다. 하지만 소수 언론과 야당 또한 일차적인 정보에 대한 접근을 차단당한 채 몇몇 민간 전문가들에 의존하여 자체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방식 역시 진실을 밝히는데 그 한계를 드러냈다. 미국 사례를 볼 때 한국 시민사회는 우선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검증할 수 있는 체계적 검증 구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만약 샌디아 조사단처럼 자체 실험 인프라와 인력풀 없이 몇몇 민간 전문가들이 이론적 검토만을 통해 문제제기하는데 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해군 당국이 실제 규모의 장약 충격 실험 요청을 연거푸 거절했을 때 미 상원 군사위원회의 강력한 지원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마도 미국은 아직까지도 아이오와호 폭발 사고를 한 동성애 수병의 자살 폭탄 테러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서는 국회차원의 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또 기술적인 내용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국내 원전의 기계적, 재료공학적 결함 여부 조사에 대해 전문성을 축적해온 원자력안전기술원 등 국내 제3기관이나 미국 샌디아 연구소와 같은 제3국의 연구 기관에 의한 검증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부여당이야말로 지방선거도 끝난 마당에 천안함을 계속 정치 수단으로 여기거나 "정부를 왜 못 믿는가?" 식의 논리로 "북한 어뢰 공격설"을 섣불리 기정 사실화려는 자세에서 벗어나 시민사회와 야당의 검증 요구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Schwoebel, Richard L. (2001), <Explosion aboard the Iowa>. DIANE Publication Company

Thompson II, Charles C. (2003), <A Glimpse of Hell: The Explosion on the USS Iowa and Its Cover-Up>, DIANE Publication Company

US General Accounting Office/National Secuirty and International Affairs Division (1991), "Battleships' Issues Arising From the Explosion Aboard the U.S.S. Iowa" Report to Congressional Requesters, January 29, 1991

US General Accounting Office/National Secuirty and International Affairs Division (1991), "U.S.S. IOWA EXPLOSION: Sandia National Laboratories' Final Technical Report", Supplement to a Report to Congressional Requesters, August 28, 1991

U.S. Senate, <REVIEW OF THE DEPARTMENT OF THE NAVY'S INVESTIGATION INTO THE GUN TURRET EXPLOSION ABOARD THE U.S.S. IOWA: hearings before the Committee on Armed Services, United States Senate, nulle Hundred First Congress, first session, November 16; December 11, 1989; May 25, 1990>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24-931 WASHINGTON : 1990

William H. Garzke, Jr. and Robert O. Dulin, Jr.(1995), <Battleships>, Naval Institute Press, Anapolis Maryland





이 글을 쓴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에너지, 핵무기 문제의 전문가입니다. 국가에너지위원회 전문위원, 일본 도쿄대 법정대학원 객원연구원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영국 서섹스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과학기술정책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편집자>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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