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당시의 악습 중에서 아직도 오해되고 있는 일이 있다. 이른바 즉결처분(卽決處分)이 그것이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전시(戰時)에는 지휘관들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진다고 믿고 있는 실정이다. 즉, 명령 불복종이나 전장 이탈을 행하는 병사는 재판 없이 처벌(=곧 총살)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즉결처분권은 6. 25 당시에도 그 폐해가 너무 심해 1년을 채 시행되지 않고 폐지된 제도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조항과 제27의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는 조항이 사라지지 않는 한, 다시는 즉결 처분과 같은 야만적 악습이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군인도 국민이기에 군사 법원에 의한 재판을 통해서만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대장이 판사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즉결 처분권은 6. 25 초기 전선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병력과 부대를 수습할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것이다. 서울이 3일만에 점령당하고 정신없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지휘관의 명령이 제대로 먹혀 들 리가 만무했다. 해서, 참모총장 명의로 "이제부터 나의 후퇴 명령 외의 모든 후퇴 명령은 무효이다."라고까지 했지만, 전선 붕괴는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나온 것이 즉결 처분권이었다. 분대장 이상의 지휘관에게 명령 불복종이나 전장 이탈을 하는 병사를 바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전장에서의 처벌이 총살인 것은 자명했다.

이러한 조치가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일 회고담으로 추측컨대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즉결 처분권을 남발하는 지휘관이 있는 부대일수록 사기가 낮았다는 증언도 있고, 또 연대 지휘소를 향해 기관총 사격까지 한 중대장이 나올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긴, 사단장 훈시 때 몸 좀 움직였다고 3명이 총살당하는 것을 본 부대의 병사들이 사단장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한 노릇이다.

 

더군다나 전장 붕괴를 막기 위해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즉결 처분권을 행사하기 보다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명령을 내리고는 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행사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개 대대 병력으로 방어해도 힘든 임무를 1개 중대에 명령해 놓고는, 이를 거부하는 중대장을 사살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즉결 처분권이 사병들에게 적용된 것보다는 소대장이나 중대장과 같은 초급 지휘관에게 적용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전시 동안 얼마나 많은 즉결 처분이 행해졌고,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어떤 이유로 처벌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 통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급 지휘관들이 희생되었다는 증언이 많은 편이다.)

더 큰 문제는 즉결 처분권의 악용 문제였다. 개인적인 앙심이나 사소한 의견 다툼으로 생긴 일까지 즉결 처분권을 이용해 복수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치정(癡情) 관계를 복수한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폐해와 함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되는 제도라는 비판 때문에 1951년 7월 10일을 시점으로 즉결처분권은 철회되었다. 1950년 7월 26일에 시작되었으니, 채 1년도 시행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일선 부대에서는 이후에도 종종 시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까지도 전시에는 자동적으로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이 부여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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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야만의 제도가 시행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구일본군의 잔재와 지휘관의 자질 부족이 그것이다.

 

만세 돌격(반자이 attack이라고 흔히 표현된다. 천황폐하 만세, 혹은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면서 육탄 돌격을 감행하는 것을 말한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일본군의 돌격에 질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전술상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나하나 소탕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데, 제발로 걸어나와 전멸해 주었으니까...)이라는, '하면 된다'고 하는 무데뽀(無鐵砲, 조총이 쓰이는 시절에 총-철포- 앞으로 칼 들고 돌격하는 미1친 놈을 일컫는 일본 숙어) 정신이 구일본 출신들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적을 막지 못하는 것은 군수(軍需)나 병력, 작전 능력,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군인 정신, 돌격 정신'이 부족해서라는 믿음이 적용된 셈이다.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객관적 능력이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오로지 군인 정신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믿고 총살의 위협으로 군인 정신을 강제해 보려고 한 것이 바로 즉결처분권이다. (이는 즉결처분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7월 26일 이전에도 이미 일선 부대에서 시행되었다는 의혹에서도 증명된다. 구일본군에서 복무했던 장교들은 즉결 처분을 당연시하는 문화에 젖어 있던 집단인 셈이다.)

 

다른 하나는 지휘관을 자질 부족이다. 부하를 지휘할 합리적인 지식이나 권위가 필요한데, 그런 능력이 없고 오로지 총으로 위협해야만 가능했던 슬픈 시대의 유산인 셈이다. 중대를 지휘하기에도 모자라는 지식과 경력을 가진 장교가 몇 단계를 건너뛰어 대대나 연대를 지휘할 수밖에 없었던, 신생 독립국 군대의 열악한 현실에서 나온 처사인 셈이다.

 

결국 즉결 처분권에 대한 평가는 어느 노병의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6·25 초전 일부 몰지각한 지휘관들은 최전선에서 분전하던 초급 장교만을 선택하여 생명을 빼앗는 가혹한 횡포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였다. 그들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말살한 즉결처분(卽決處分)이라는 용어가 유일한 무기이며 방편인 듯했다. 그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지휘권 남용과 횡포로, 명령에 복종하는 초급장교의 충성을 짓밟았다. 그들은 계급적인 우월감으로 공포와 강압을 자행하여 암흑사의 주역으로 등장되었던 어두운 그림자였다. 그들의 잔인한 횡포는 포화(砲火)보다, 적군보다 더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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