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을 달린
                한국인의 장갑열차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한 철기 이범석 장군은 (전 광복군 참모장
국방부 장관 및 국무총리)은 일본군의 추격으로 러시아로
피신했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와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아주던
마 점산, 장 종창, 소 병문등의 만주 군벌들에게 초빙을 받아서
그들의 항일전에 한 몫을 한다.

군벌중에서도 장경혜 -나중에  만주국 총리- 같은 친일파도 있었지만

이 범석 씨가 같이 일한 군벌들은 반일적이었다.


그가 만주 서북방 지역의 군벌 소 병문 장군 밑에서 일 할 때였다.

소병문 장군은 무식한 장작림이나 마 점산과 같이 녹림 출신

(마적들이 자신을 높여 부른 말 )이 아니라 제대로 보정 군관학교라는
신식 사관학교를 나온 정규군 출신이었다.

그는 일본군과 사이가 안 좋아 일본 거주민 수백 명을 억류하는
도발을 하는등 항상 일본군과 분쟁을 일삼았다.


소병문 장군은 그에게 그의 비서로서 일해주기를 청했었고 항상

반일 투쟁의 기회를 찾던 이범석 장군은 항일 투쟁의 일환으로서도

했지만 소병문의 지역에서 일본과 한통속으로 의심받는 조선인 동포들을 보호하기위해서도 선선히 응락을 했다.


소 병문 장군의 초빙을 응락할 때도 그가 요청했던 것은 일본인의
첩자나 협력자로 의심받고 학대받는 조선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중단하는 조건이었다.


소 병문 군대가 일본군과 대결에서 결정적으로 불리했던 것은

러시아로 가는 중동부 철도에 나타난 일본군의 한 개 장갑 열차의

활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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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장군은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때의 일을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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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장군 밑에 있을 때였다.

일본군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때 일본관동군이 갖고 있던 장갑 열차는 봉천에 있던
중국 동북군 소유의 것이었다.

완전한 것 5개 열차 와 불완전한 2개 열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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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군은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되었던 열차 폭발로 죽은 봉천 군벌
장작림의 군대를 말한다.
열차 폭발은 일본군의 가와모토(河本)중좌 일당이 저지른 짓이었다.

결과로 만주사변이 일어났고 일본은 빠르게 만주를 접수해 나갔다. 

일본군은 그의 군대를 중국 본토로 퇴각시키고 장갑 열차들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이 동북군은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지휘했는데 장개석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모택동 군대 토벌에 동원되었었다.

여기서 알력이 생겨 장학량이 장개석을 구금하는 서안 사건이 생겼다.

사건은 우습게 끝나고 장학량은 지휘권을 빼았기고 장개석에게
구금당해 그 상태로 대만까지 따라 가서 1990년 장개석이 죽은 뒤에야  연금이 풀렸다.
1995년 하와이에 이주해서 100살이 넘도록 살다가 2001년 사망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장갑열차와 불완전한 장갑열차는

여러 량의 전 열차가 완전 장갑 된 것을 말하고 불완전한 것은

전 차량 중에 일부 차량만 한 것이다.

나는 미국 경매 사이트 ebay에서 구입한 1937년도에
일본군의 화보가
한 권 있는데 여기에 관동군의
장갑열차의 사진이 나와 있다.

보니까 그 것이 바로 장 작림에게서 빼앗은 불완전한
장갑
열차 같았는데

일부 화차와 장거리포를 실은 차량이 장갑 되지가 않은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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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각지에서 의용군이 일어나고 철도 연변에도 항일 정규군이

밀려들자 일본군은 장갑열차를 각 노선에 분산 활용하였다.

소병문 장군이 웅거하던 중동철도 서부지선 지역에는

1개 열차밖에 배당되지 않았지만 이것이 중국군에게
굉장한 타격을 주었다.

야전에서 탱크가 보병을 지원해서 포병의 대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갑열차가 진격할 때엔 공격을 엄호하고
정지했을 때는 진지의
지탱점이 되었다.

강한 화력과 굉장한 돌파력을 발휘하므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홀라얼치에서 철퇴해서 덴즈산까지 쫓기었다.


대응책의 강구가 시급했다.

나는 궁리 끝에 찰란툰 역엔 아메리칸스키 뽀루바곤
무개(無蓋) 화물차가
많이 놀고 있는 것을 이 차량을
활용하기로 머리를 짜냈다.

우선 비밀조처를 철저히 취했다.

기사들을 총 소집하고 기재를 총동원 시켰다.

이것들을 격납고 안에 들여놓고 밤을 새워 감독 지도한지 일주일 만에

훌륭한 장갑열차를 내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말았다.

본래 군에서의 가장 중요한 창의는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이다.

대용품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사도 아닌 나였지만 전술적으로 꼭 필요하므로 장갑열차를

만들게 된 것이다.

무개화차 안에 ,레일을 짤라 이것을 말뚝 삼아 돌려 꽂고

두터운 널을 돌라 붙여서 차에 이중벽을 만든 다음 이 사이에

돌과 모래를 부어 적탄을 막도록 했다. 차위에서는
레일을 촘촘히 걸치고
그 위에 모래 주머니를
일미터 60센티가량 쌓아놓았다.

차는 삥 돌라가며 총쏘는 구멍을 만들어서
소총 기관총을 자유롭게
발사하도록 했다.

또 기관차는 이들 열차 중각에 위치하게 하여 앞뒤로 움직이게 하고

앞2,3량 뒤로 2.3량씩 개조한 차를 달게 헸다.

기관차를 중간에 놓으니 앞뒤 차에 보호되어
직격탄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적당하게 차 칸을 달았으므로 진퇴가 자유 자재엿다.

구경 작은 포탄은 뚫지 못하고 돌과 모래를 채워 넣은
방탄 이중벽으로
화차를 둘렀으나 군인들이 들어 설정도로
열차가 넓고 컸다.

시베리아 중동철도는 세계에서 제일 넓은 궤도 이므로
차량의 폭이 그토록 넓고 커서
가능했던 것이다.

보병장교를 선발해서 내가 꾸민 열차의 활용전술을 가르쳐서 이로서

일본군을 기습, 마침내 텐즈 산을 탈환했다.

마 점산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치치하얼에서 달려 와서 치하했다.

아프리카 북부전선에서 롬멜과 몽고메리가 싸우던 사막전 이야기와도

비슷하지만 이 장갑열차는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뜻밖의 이것의 출현에 한창 당황해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장갑열차는 기차가 탄생하고 얼마 안 되어서부터 그 개념이 탄생했던    

무기 체계였었다.

기관차와 병력수송용 객차 그리고 포를 실은 포차등을 섞어서 배치한

열차를 철갑을 입혀서 전차처럼 완전 장갑 화한 것이다.

장갑 재료로 철판만 사용 된 것이 아니라 시멘트와 돌까지 사용되어서

어지간한 포탄 따위에는 꿈쩍도 안하는 문자 그대로 움직이는

육상 강철 전함이다.


구성도 다양해서 나중에는 전차와 장갑열차를 결합한

전차 탑재 장갑 열차나 대공포 전문 열차까지 나왔었다. 


장갑열차의 역사적 전투 데뷔는 1860년 미국 남북전쟁의 전장에서였다.

그리고 이어서 보불전쟁과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
그리고 일차세계 대전과
러시아의 내전을 거쳐 이차세계
대전까지 때까지 널리 사용되었었다.


이차 세계 대전은 장갑열차의 한계성을 그대로 나타내주어

장갑열차의 수명은 거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차량의 발달과 전차와 장갑차의 발달은 장갑열차의 업무를 대부분

빼앗아 가버렸고 항공기의 발달은 장갑열차가 활동을 완전히
제압해서
장갑열차가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러나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역사의 유물로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장갑열차가 띄엄띄엄 역사에 얼굴을 내밀었다.

장갑열차는 프랑스와 베트민이 대결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운용되었고
다시 역사를 훌쩍 뛰어 넘어 유고 내전과 체첸 전까지도
사용되었다.


장갑열차가 화려하게 활약한 무대는 볼쉐비키가 일으킨

1917년 10월 혁명 뒤 1918년부터 1920년 적군(赤軍)과

황제 지지의 백군(白軍)사이에 벌어졌던 러시아 내전 때였다.

전장인 러시아 국토의 대부분이 장거리 기동이 필요했던 광활한

평야지대인데다가 도로망이 잘 갖추어지지 않은 교통의 문제도
있어서
장갑열차가 실력 발휘를 할 이상적인 무대가 잘 갖추어진
상태였다.


내전은 볼쉐비키들의 적군이 전장의 주도권을 쥔 뒤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백군을 극동 쪽으로 몰아붙이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나 소련을 침공할 때 전차 부대가

앞장섰듯이 열정이 치열했을 대  적군이 백군을 공격했을 때

이 장갑열차들이 큰 몫을 했다.


장갑열차는 특히 철도가 닿는 도시를 공격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근대 지상부대의 공격 형태는 보병과 전차와 포병의 합동으로(步戰砲)

이루는 작전이 전형인데 사실 장갑열차는 상기 세 가지의 요소를

전부 갖춘 공격 무기였다.

비록 철로에 한정되는 기동의 한계와 항공 공격에 취약한 문제점은

있었지만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공격목표인 도시에 접근해서 보병을 하차시키고 화력으로 지원하기도

하고 때로는 도시의 중심지인 역으로 병력을 싣고 기습적인 돌격을

가하기도 했었다.


육이오 사변 때  개성 북방의 전선을 지키며 싸우던 한국

육군 1사단 12 연대는 끊어 놓은 철로를 연결시킨 뒤 기습적으로

열차를 몰고 개성 역으로 돌입해 들어온 북한군 철도 부대에게
심장부를
강타당하고 임진강 다리를 넘어가는 철수를 서둘러야 했다.


북한군의 남침 작전 계획 수립은 소련군 고문관들이 수립했다고 하는데

이 열차 돌격도 러시아 내전의 전사를 잘 알 수도 있었던 그들이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장갑열차가 백군을 밀어내는 작전에서 큰 효과가 있슴을 보게 된

적군(赤軍)은 장갑열차를 대량으로 만들어 냈다.

한가지의 장갑열차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공격 형, 화력지원 형,
병력수송형등등 세 가지의 개념을 중심으로 장갑 열차들이
분화 제작되었었다.


전투를 되풀이함에 따라 정교한 전술교리도 발전되었고 이에 따라
장갑열차 승무원들은 한 달 이상의 특별 교육을 받아서 전선에
투입되었다.


러시아 적군이 내전동안 제작해 낸 장갑열차만도 300개 열차나 된다.

수준을 보면 동네 대장간에서 만든 것 같은 조잡한 것에서부터

아주 정교하게 만든 것까지 천차만별이다.


세계 역사상 장갑열차가 이렇게 대량으로 이런 단시간에
제작된 일이
일찍이 없었다.


저항하면서도 동쪽으로 밀리던 백군(白軍)들도 자체 제작하거나

노획한 장갑열차들을 많이 운용하였다. 

그러나 백군들은 2년간의 전투 끝에 시베리아 철도의 동쪽 끝까지

밀리고 결국 그들의 존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내전의 끝이 보이자 백군이 보유한 장갑 열차중 소수가 군벌들이

지배하던 만주 쪽으로 도주하였다.

지형이 시베리아와 비슷하고 치안이 불안한 만주에서 장갑차의

또 다른 무대가 될 듯했다.

군벌들은 무시무시하게 위력 있어 보이는 장갑열차를 받아

들였을 뿐더러 자체 제작을 해서 무장열차를 보유했다.


장갑열차를 최대로 많이 보유해서 자신의 주력 무기체계로

활용한 군벌은 개고기 장군이라 불리던 장 종창(張宗昌)이다.

그는 장갑열차뿐만 아니라 이 장갑열차를 조작할 백군들도

대거 채용했었다.


장 종창에게 간 장갑열차 외에도 장작림에게 팔려간 장갑열차도 있다.

앞글에서 이범석 장군이 말한 바와 같이 장작림의 장갑열차 중에

일부는 자체 제작하고 일부는 퇴각하던 백군으로부터 구입한

것이다.


장작림의 장갑열차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 군벌들 공격에 사용되자

이 범석 장군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자재로 장갑열차를

만들어서 전투에 사용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의 군벌들은 원체 막강한 일본 관동군에게

별 힘을 쓰지 못하고 대거 소련으로 탈출한다.

만주 땅에서 군벌들을 일소한 일본은 청조 마지막 황제 부의를

데려다가 만주국을 만든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고, 비록 남의 나라 군사력을 이용해서

일본군에 저항했지만 한국의 항일 무력 투쟁에서 이범석 장군의

장갑열차 제작과 사용은 작지만 역사의 페이지에 기록되어야 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분의 자서전을 빼놓고 어느 곳에서

이런 기록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북한이 그들이 말하는 항일 투쟁에서 광산의 다이나마이트로

임기응변으로 만든 연길 폭탄은 그들의 항일 투쟁의 성경(聖經)격인

‘회상기‘ 에도 나오고 북한군 군 교육 교재에도 다룰 만큼 크게

조명하고 있다.

우리의 항일투쟁사를 다루는 비중과 열의가 달리 보이는 대목이다.

장갑열차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고 앞으로도 다시 역사의
페이지에
나타날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무장 열차가 운행되는 곳이 있다.

변태스러운 일이 자주 벌어지는  북한이 그 곳이다.


김일성은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소련이나 중국으로 나들이

나갈 때는  그 나라 사정 생각은 안하고 장갑열차를 타고 다녔다.


열차 방문은 방문국가가 대규모의 경호를 해야 하는 달갑지 않은

절차가 따르지만 김 부자는 이를 상관치 않았었다.

(김정일의 전번 러시아 방문 때 불편을 겪은 철도 이용객으로부터

항의가 대단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중국의 동포로부터

들은바 있다.)


김 부자의 장갑열차는 경호 목적으로 꼭 같이 생긴 3개 열차로서
동시에 운행된다.

이 열차는 러시아가 북한에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장갑열차들이다.


몇 년 전 러시아 방문에 나섰던 김정일이 타고 간 장갑열차는

새로 제작된 장갑열차라고 하지만 하여튼 이 장갑열차는
비행기 무서워하는
고소 공포증까지 아버지로부터 유전 받은
김정일의 생전에는
계속 운행 될 것 같다.


러시아 내전 때 쓰던 장갑열차가 등장하던 영화가 있었다.

지금도 잊지 못할 명화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주 보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다.(1965년 제작)


창백한 운동권 학생에서 선생이 되고, 짜르 군대의 사병이 되고, 결국은

잔인한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적군(赤軍)장군 스트렐니코프로 변신한
라라의 남편 빠샤가 장갑열차를 타고 달리는
장면이다.


뒤에 달린 차량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지휘용 장갑열차다. 

냉혹한 인간 역을 연기한 영국배우 톰 코트네이의 차가운 연기가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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