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하노이 대폭격

B 52 최악의 11일간

 월맹의 샘 미사일 1000발 발사와

          미 공군 B52가 15기 격추된 라인백커 2 작전


B52


1972년 미국의 닉슨 공화당 정부는 7년에 접어든 월남전에서

발을 한창 빼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대통령 안보 수석 비서관이며 국제적인 해결사인 헨리 키징거가 주도하는 파리 협상이 막판에 갈등이 생겨 북베트남이 회담장에 나오기를 거부했다.


빨리빨리 회담을 매듭짓고 이 진흙탕에서 빠져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미국은 최대의 공군력으로 월맹을 그 심장부인 하노이를
두들겨 패서
회담장으로 끌어낼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미증유의 대 폭격이 실시되게 되었다.


하노이는 그 때까지 일종의 성역이었다.

정치적인 갈등을 우려해서 하노이 외곽 20킬로 안의 폭격을

금지해오던 미군은 이번에 자신들이 설정했던 그런 성역을

깡그리 무시하기로 하였다.

월맹의 심장부라면 어디든 무제한의 불벼락을 안겨주겠다는 것이었다. 


핵전쟁을 염두에 두고 창설된 전략공군(SAC)의 B52가 작전의 주역을

맡고 나선 이 대 폭격에서 월맹군의 SAM 미사일 일 천발이 발사되었고

미국의 B 52 열다섯 기도 격추되는 대 공중 폭격의
역사가 기록되게 된다.


B52 무장력의 크기


팬텀 같은 전폭기처럼 저고도 침투가 가능 한 것도 아니고 미사일이

발사되면 급속하게 회피 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B52는

월맹의 소련제 샘 미사일의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B52는 월남전 개전 이래  샘 미사일의 위협이 없는
남쪽 월남과
라오스 전선에만 투입되었었다.


반면 하노이는 세계 역사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엄청난 대공 포대의 네트워크로 전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처음에는 SAC 고위층에서는 백악관의 의견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SAC 장교들 일부에서 핵전쟁을 위하여 조직된 SAC가
적의 미사일 방공망을 뚫은 폭격을 성공시켜서 재래식 전쟁의 전
략 목적에도 SAC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자는
의견이 팽배하였다.


이들이 객기를 부린 것은 얼마 전 10월에 끝난 라인백커 작전에서 

괌의 B 52가 남 중국 해를 건너가 하이퐁 항에 치고 빠지는 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사실이 고무되었던 것도 있었다.

그 무렵 SAC조종사들은 엘리트 의식이 대단했고
전술 폭격기 조종사들을
막벌이 노동자같이 보는 오만한 시각을
가진 조종사도 있었다.


그런 조직 분위기는 오만한 자신들의 ‘사고의 우월함’만 믿게 만들고
‘현실의 분석’은 항상 게으르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여러 정치적인 외부 사정과 내부의 자신감이 B52를 대량

동원한 이차 세계 대전 식 공중 폭격 작전이 전개되게 한 것이다.


모든 주요 군사 작전이 그렇듯 이 대폭격에도 이름이 붙여졌다.

라인백커 2 작전(Operation Linebacker 2)으로서 그 해 5월부터 10월까지 남부 월남으로 가는 보급선 차단을 위해서 월맹 중남부를 목표로 전개된 작전명 라인백커 작전을 이어 전개하는 후속 작전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참고적으로 밝혀두면 라인백커란 미식축구의 포지션 이름이다.


라인백커 2작전에 동원 할 B52 주력 공격 자원은
괌 엔더슨 공군기지의 157기, 태국 우타파오 기지의 53기였다.
이들 B52들은 D형과 G형의 혼합이었다.

물론 B52만 공격을 이끈 것이 아니라 통킹 만의 미 항모부대와 월남과

태국의 미 공군기들도 원호 출격하기로 했다.

특히 새로 공군에 편입된 최신예기 F111가 대거 전투에 참가했다.


 F111

폭격은 적들의 집중적인 대공포화를 피 할 수 있는
야간에 실시하기로 했다.

기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오른 레이다 폭격 방법이 동원 될 것이다.


1972년 12월 18일, D+1.

공격은  야간에 개시되었다.

폭탄을 잔뜩 품은 B52들이 괌과 태국의 밤하늘로 치고 올라

지금까지 가보지 못했던 가장 위험한 목적지로 향했다.

목표는 하노이 시 주변의 적 군용 비행장들과 병참 창고 등이었다.


오마하 SAC 사령부에서 작성한 작전 계획에 따라 폭격은 삼파(三波)로

나누어 축차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이루어 졌다.

세 번에 걸쳐 B52가 하노이을 폭격한다는 시나리오로서 폭격대는

같은 항로, 같은 고도로 접근해서 폭탄을 투하하고 귀환도 같은 항로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B52


이 작전에서 폭격을 완료한 B52가 귀환하기 위해서 일정한 지점에서

방향을 180도로 돌리는 것은 적의 레이다를 지향했던 ECM의 안테나가

목표에서 잠시 떨어지는 간격을 만들어 내 B52의 기체가 적의 레이다에

완전하게 잡히는 취약점을 노출했다.


더 해서 귀환 길에 오른 공격편대는 같은 항로를 따라 뒤따라오는 다음 공격파의 B52와 충돌 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수립된 작전은 세계에서 가장 방공망이 조밀하게 설치된 전혀 전장상황이 배려되지 않은 것으로 마치 훈련 비행 계획 시간표 짜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무리한 이 작전은 전적으로 미 본토 네브라스카 주의 오마하

OFFPUT기지에서 SAC 사령부의 월남전의 현장 감각이 없는

책상물림 장교들이 작전 수립을 했다는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닉슨은 작전의 강행을 결정하고 내려온 갑작스러운 지시 때문에

작전수립에 단지 3일간의 시간만이 주어 진 것이 더욱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공군 전폭기들이 대공 포대에 선제공격을 했고 미사일 포대의 레이다를

무력화 시키는 체프를 엄청나게 뿌렸다.

더해서 목표 지역에 진입직전부터 B52의 유일한 대 미사일 무기인

전파 교란 장치(ECM)가 작전 내내 작동했지만 월맹군의 대공 포대는

극심하게 저항했다.


B52 제 일파가 하노이에 접근하여 전투 구역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전조룰 보이는 피해가 발상했다.

괌에서 출격한 공격 대장기가 목표물을 불과 몇 분 앞두고
샘에 피격되었다.

조종사 도날드 리씨 대령과 후미 기총수 왈트 페거손 상사가 추락하는

폭격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  탈출한 네 명의 장교들은
포로가 되거나
실종 되었다.

다른 폭격기 두기가 더 격추되고 한기가 대파되어 겨우 태국의
우타파오
기지로 긴급 불시착했다.

첫날 월맹군은 무려 220발의 샘 미사일을 하늘에 뿌려댔다.


19일, D+2

다음날인 19일도 93기의 B52들이 출격해서 하노이의 철도창과

물자 집결지, 그리고 화력 발전소를 강타하였다.

월맹군의 대공 미사일 포대는 185발의 샘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다행이

손상을 입은 폭격기는 있었지만 격추된 폭격기는 없었다.


소제 샘 (SAM) 미사일 2

그러나 첫 날과 꼭 같은 방법으로 실행한 두 번째의 폭격작전은

월맹 미사일 포대 사령부에게 미군의 작전이 완전히 읽혀버려
그들로
하여금 단단한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오고 가는 길을 알았으니 이제 길목만 지키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만 것이다.


폭탄 투하중의 B52

20일, D+3

작전 사흘째 12월 20일 최악의 날이 출격하는 B52를 기다리고 있었다.

괌과 태국에서 99기가 출격했다.

목표는 역시 하노이 일대 전략 목표들, 철도 조차장, 물자 집결지,

화력 발전소, 그리고 원유 저장시설 등이었다.

월맹이 작심하고 기다리는 것을 모르던 미 공군은 변함없이

세 개의 공격대가 파상적으로 공격하던 그 전날들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는
꼭 같은 비행경로를 밟았다.

대기하고서 목을 지키고 있던 월맹 샘 대공 포대는 그날 무려 300발의

샘 미사일을 쏴 올렸다.


이날은 이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B17 폭격대가 독일 슈바인푸르트의

볼베어링 공장을 폭격하다가 70기가 격추당한 비극을 되생각하게

만드는 최악의 날이 되었다.

무려 7기의 B-52 폭격기가 격추 당하고 한 기가 대파되어 겨우 태국의

우타파오 기지로 돌아 가다가 라오스에서 추락했다.

거대 폭격기 8기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오마하의 SAC는 자기들이 주관한 작전에서 큰 피해가 나오자
그 핑계를
B52에 실린 적 전자 교란 장치(ECM)의 성능 부족으로
돌렸다.


그래서 좀 더 강한 전자 교란이 가능한 ECM을 탑재한

태국 우타파오 기지의 B52폭격기만 라인백커 2작전에
동원하기로 했다.

이것은 B52의 출격 횟수가 대폭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일, D+4

우타파오 기지의 30기가 출격해서 하노이 주변의
공군 기지와
물자 집적소를 폭격했다.

그리고 여전히 꼭 같은 축차 진입, 꼭 같은 경로 꼭 같은 고도의

융통성 없는 작전이 계속되었고 이 날도 두 기가 격추되었다.


22일, D+5

폭격의 목표가 하노이에서 하이퐁으로 변경되고 30기가

출격하여 하이퐁의 유류 저장고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기습적으로 하이퐁을 친 이날의 작전은 성과를 거두어서 손실된

폭격기는 없었다.


폭탄 투하중의 B52


23일, D+6

야간에 30기가 출격하여 샘 대공 포대와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다.

격추된 폭격기가 없었다.

폭격기의 전무한 피해는 이날 적극 투입된 최신예기 F 111기가 샘 대공 포대를 무력화 시킨 공이 크다.


작전 첫날 1기가 격추되기는 했지만 야간 저공 침투 기능을 가진 F111의
성능이 며칠간의 운용으로 증명되어 가장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 것인데 그날 1기가 격추되긴 했지만 유감없는 능력 발휘를 해서 B52의 손실을 막아낸 것이다.


F111


24일, D+7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30기의 폭격기가 출격해서 하노이 주변의

철도 교통망을 폭격했다.

손실은 없었다.


25일.

크리스마스는 미국 정부가 발표한 36시간 휴전이 발효되어서

폭격이 없었다.


미 공군은 이 짧은 휴전을 최대로 활용했다.

그간 큰 비난을 받아오던 오마하의 SAC가 수립한 융통성 없는 시간차  폭격 작전이 대폭 수정하게 되었다.


라인백커 2 작전에 관한 권한이 괌에 있는 앤더슨 공군기지의 제 8공군으로 전적으로 이양 되었다.

그간 힘든 폭격 작전을 수행하면서 문제점과 개선점을 직접 경험한

괌 현지의 작전 장교들은 훨씬 전장 현실에 다가간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작전 주역 미 8공군 엠블렘


기계적 준비도 마무리 되었다.
괌의 앤더슨 기지의 B52기들의 ECM도 대폭 업그레이드되어 작전에
참가 할 수가 있었다. 


심장부인 하노이의 주요 폭격 목표는 그 간의 B52 폭격으로 거의

파괴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간 차선의 폭격대상으로 미루어 놓았던 하노이와 하이퐁

주변의 10개 목표가 이번 목표로 선정되었다.


폭격은 괌의 8공군에서 만든 새로운 작전에 따라 이루어졌다.

목표 침투는 7개의 경로로 나누어 들어가고 폭격 후 경로도
제각각 흩어져서 돌아오게 되게 했다.

열 개의 목표 타격도 시차를 거의 두지 않고 거의 동시에,
최대 20분 내에
전부 폭격 완료하기로 했다.


SAC의 책상물림들이 했던 작전을 모두 뒤집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대단히 많은 112기나 되는 공군과 해군의 전술기들이
지원과 엄호에 나섰다.


 

해군 전폭기들의 작전 엄호


12월 26일, D+8

전과 같이 야간에 120기의 B52 폭격기가 괌과 태국에서 발진했다.

폭격은 정확히 작전 계획대로 실시되었다.

전폭기들이 폭격기의 바로 항로 전방을 비행하면서 레이다 망을
안개처럼 흐릿하게 만드는 엄청난 양의 채프를 뿌렸다.


그간 많은 손상을 입은 월맹의 방공 시스템은 동시에 다수의 목표에
나타난 대형 폭격기들과 전폭기들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하노이 지역으로 내습한 B52들에게 발사해댄

샘 미사일만 950발이나 된 때문에  월맹에 있던 대공 미사일도 거의

그재고가 바닥난 참이였다.


120기가 출격한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B52에게 쏴댄 샘 미사일이

겨우 65발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한 기만이 추락했고 한 기가 태국 우타파오 기지로 다 와서 활주로 밖에 불시착하여 대파되었다.


27일, D+9

60기가 출격하여 샘 미사일 기지와 철도 조차장을 폭격했다.

한기가 목표물 상공에서 피격되어 격추되었고 다른 한기가

대파되어 귀환하다가 라오스 상공에서 추락했다.


12월 28일, D+10

60기의 폭격기가 여섯 그룹으로 나뉘어 하노이 일대의 목표를 일시에 타격했고 그중 한 그룹은 북쪽으로 올라가 중국에서 오는 보급로의
요지인
 란손 남쪽 란단 역의 철도를 폭격했다.

피해가 없었다.


12월 29일, D+11

작전의 마지막 날이다.

60기가 출격했지만 이미 더 폭격할 주요 목표물이 하노이 주변에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30기는 월맹 남부와 북부 월남의 아크라이트 작전을
지원했고 나머지 30기만이 출격해서 새로 발견된 샘 미사일의
보관창과 철도를 폭격했다.

이날도 피해는 없었다.


11일간의 라인백커 2 작전으로 엄청난 폭탄을 뒤집어 쓴 월맹은
더 이상
못 견딜 지경이 되었다.

월맹은 미군의 폭격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단서를 달면서도 파리 협상장으로 나가겠다고 발표함으로서 미국은 폭격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고 라이백커 2 작전은 종결되었다.


라인백커 2 작전을 수치로 표현해본다.


제 8공군의 B52는 729회의 총 출격회수를 기록했다,

B52의 투하 폭탄 량이 15,000톤이고 여기에 해공군의 전폭기들이

5,000톤을  추가 했다.


10기의 B52가 월맹 상공에서 격추 되었고 다섯 기가 라오스나
타일랜드에서 추락하거나 불시착해서 대파되었다.


격추된 미군기의 잔해 - 하노이 군사 박물관


 

33명의 B52 승무원들이 전사 또는 실종했고 26명이

비상 탈출했다가 구조 되었다.


그러나 적의 손에 떨어져 포로가 된 승무원도 33명이 되었다.


월맹의 피해는 철도 시설의 500곳이 파괴 절단 되었고

화차 372량이 운영 불능 상태로 대파되었다,

그리고 300만 갤런의 유류가 다 타 버렸고 월맹 발전량의
80퍼센트가 공급이 중단되었다.


 라인백커 2 작전의 피해상황


이 라인백커 2 작전에서 B52가 주역을 해서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지만 공군과 해군의 전폭기들도 큰 몫을 했다.

공군이 총 출격 횟수 769회 해군의 총 출격 횟수 505회나 된다.


전폭기들의 총 출격 횟수 1,000회가 넘으면서도 격추된 것은
단지 12기 뿐이어서 B52보다 오히려 피해가 적다.


나중에 이유가 밝혀졌다.

월맹의 미사일 포대들이 낮이나 밤에 나타난 전폭기들은 그냥 보내고 밤에만 나타나는 B52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비싼 실탄을 참새 잡이가 아니라 기러기 같은 대형 엽물(獵物)을
잡기위해서 아꼈다는 말이다.


일화도 많이 남겼다.

월맹의 MIG 17이 B52를 잡겠다고 추격해 왔다가 B52의 미 기관포에 격추되기도 한 일이 이 작전에서 발생했다.


미그 17 
 

최신예기 F111이 두기나 격추되었지만 야간의 저공 침투 기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어서 야간 저공 침투기능은 향후 전투기 개발과

운용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22일 폭격에서 하노이 남쪽의 박마이 공군기지를 폭격하던 B52기는

실수로 활주로에서 일 키로 떨어진 병원을 잘못 폭격하여 28명의

사망자가 나오게 만들었다.

다행히 환자들은 미리 대피해서 피해자는 의사나 간호원등의

병원 직원들이었다.

그러나 이 병원 폭격은 월맹이나 미국 내 반전시위자들에게 좋은
선전꺼리를 제공하여서 미국의 라인백커 2 작전은 심한 비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초기에 융통성 없는 작전으로 피해를 보게 했던 SAC의 오마하 작전
부서는
그 뒤에도 계속 뭇매를 맞았다.


이들은 작전의 쉬운 실행과 미그기의 영격을 염두에 두고 그런 분산
축차 투입의 작전을 펼쳤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통하지가 않았다.


야간에는 샘 미사일의 위협이 훨씬 큰 변수인데도 이 변수를
외면했으니
변명이 먹힐 리가 없었다.


SAC의 장교들이 남베트남의 SAM이 없는 장기간의 작전 상황에

익숙해진 안이한 정신 자세가 세계 최강의 하노이 미사일 방공망을
경시하는 한심한 작전을 하게 만들었고 결과 이런 피해를

가져 왔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B52의 대량 동원된 라인백커 2 작전은 미 공군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B52를 다시는 대공 미사일망이 잘 짜여 진 곳으로는 절대로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때 B29 폭격기를 미그기 출몰지역인 압록강 근처까지
출격시켰다가 미그기의 로케트 공격에 큰 피해를 입고 그 뒤는
작전선의 북방 한계선 설치와 야간 폭격의 중시의 전술을 바꾸었는데 이번에도 피해에서 교훈을 얻게 된 셈이다.


4,50년대식으로 중폭격기를 동원하여 소련의 방어망을 뚫고 깊이 침투하여 적의 목표를 강타한다는 개념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모멘트가 된다.

이 발견이 결국 방공망을 뚫을 최선의 방법으로서 이미 검토중인
스텔스기 발에 힘을 얹어주게
되었고 F117과 B2 폭격기를 개발하는
시발점의 한 단초가 되었다.


라인백커 2 작전의 대량 폭격으로 월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미국은
대강 협상을 마무리 짓고 지켜지지 않을 것이 뻔한 협정에
조인
한 다음 미군을 베트남에서 전원 철군 시켰다.

B52는 그 뒤  냉전의 붕괴로  본래의  목적이었던 소련 영토의 핵폭격의 필요성이 완전히 소멸 되었다.

그러나 국지전에서 소요가 계속 생겼고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B52는 여러 변신을 거듭하여 40년이 지난 오늘에도 크루즈 미사일이나 스마트 폭탄등의 운반기로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걸프전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재래식 폭격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군 조종사로서  대를 이어 꼭같은 B52를
조종했다는 일화가 말해주듯 B52는 다용도 폭격기로서 당분간
그 수명을 연장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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