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를 아는 일본군도 있었다.

   --일본 해군 격추 왕 사카이 사부로(坂井 三郞)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때부터 미국에 굴복하고 항복한 1945년까지

7년간 일본군이 보인 잔인함은 그 범죄들이 소위 20세기의 문명권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을 만큼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20 만 명이 죽었다는 악명 높은 남경 대 학살 뿐만이 아니다.

태평양을 무대로 벌어진 각 전장에서 일본군에 의한 비윤리적인
학살은
상습적으로 자행되었다.


소위 무사도를 교육받았다는 장교들부터 항자불살(降者不殺)의

동양적 윤리관 따위는 땅에 내 버리고 포로의 무자비한 학살에
앞장섰다.

이차세계 대전 내내 그들의 알량한 무사도의 추악한
실체가 도처에서
볼 쌍 사납게 노출 되었다.


공중에서 떨어진 조종사는 이들이 즐겨 죽이는 희생자들이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일부 일본군들은 그냥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죽인 포로의 신체를 훼손해서 먹기도 했다

식인행위는 보급이 끊어진  태평양 일선에서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일본군은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15세기 전장 터에서나 나올 군도를

지급했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은 실전에서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포로들의

목 치는 학살용으로 쓰였다.


일본군이 목을 날려버린 사람들 중에는 신부나 목사 같은
성직자도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장에서 이들이 칼을 실험한 대상은 대부분의
하늘에서
떨어진 조종사나 승무원들이었다.


미국,오스트렐리아,뉴질랜드등의 조종사로서 목이 날아간
사람들만도 33명이나 되었다.


여기에 학살의 현장 사진이 있다.

지금도 각종 메스컴에 많이 나오는 유명한 사진이다.

 

포로의 참수 처형

칼을 든 인간은 일본군 장교이고  구덩이를 앞두고  넋이 나간채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며칠 전에 조종하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뉴질랜드의 조종사이다.


이 사진이 찍히고 몇 초도 안 되어서 그의 목은 날아갔다.

위의 유명한 사진은 전후 연합군이 압수한 일본군 서류더미에서

발견 된 것이다.


위의 사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찾기 힘들다.

그러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위의 칼을 든 일본군 장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연수때 미국에 간 기회에 근처 도서관에 간 일이 있었다.

그 도서관에는 지금은 폐간된 사진 시사 잡지 'Life'지가 창간 호부터

여러 묶음이 되어 한 책가 전체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차 세계 대전 때부터 한 책 한 책 보던 나는 전쟁이 끝나고 몇 달

뒤에 발간된 라이프지에서 위의 사진을 발견했다.

위의 사진에서 칼을 든 일본 장교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윗 사진에서  칼을 든 장교의 이름을 케네스 유노네였다.

캐나다에서 자라고 캐나다에서 교육 받은 캐나다의 일본인이였다.


처형당하는 사람은 여러 매체에서 오스트렐리아 공군 비행사로 나오지만 그 책의 기록으로는 뉴질랜드 군 중위로 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감스럽게도 그 중위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말로만 듣던 참수 처형을 처음 본 미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일본인이라지만 서방의 문화와 서구식 교육을 받은 인간이
감히 사진과 같은 짐승같은 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라이프지가 대단히 격분한 제목과 내용을 실었던 것이 기억난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은 실종된 조종사의 소재를 낱낱이 파악하여

참수된 포로들의 가해자는 전부 처형했다.


친절하게 증거 사진까지 남긴 위의 유노네도 물론 처형되었다.

뒤에 착검하고 지켜보는 인간들은 처형 될 포로가 난동을 부릴 때를
대비한
확인 살해대로서 이 참수 처형을 더욱 가증스럽게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일본군에 야차와 같은 살인마 같은 인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학살은 주로 일본 육군이 저질렀고 일본 해군은 비교적 신사적이었다.


지면 관계로 일일히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태평양 전사를 보면 일본 해군 조종사들의 기사도적인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이차 세계 대전을 살아 남은 일본 해군 조종사중 최고 에이스인

사카이 사부로(坂井 三郞)는 기사도라는 면에서 매우 돋보이는

조종사였다.


사카이 사부로


사카이는 중국 전선에서부터 출전하기 시작하여  1942년  8월 

과달카날 상공에서 중상을 입을 때까지 60기의 적기를 격추한

일본 해군의 격추 왕이었다.


그는 일본 사가 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학창시절 싸움을 일삼는 불량소년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였다.

싸움질만 일삼다가 학교에서 낙제를 하고 말았다.


이를 창피하게 생각한 그는 그 길로 해군에 입대하여 수병으로 몇 년

근무하다가 경쟁율 높은 가스미가우라의 해군 비행병 학교를 지원 합격해서 3년간 훈련을 거쳐 수석 졸업하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사카이는 전쟁이 끝난 50년대에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대공의 사무라이’를 출간했다


이 책은 구미에도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장기간
몇 번이나 출
판 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나는 대학 시절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고물 외국 서적을 판매하는
점포에서 항공 작가
마틴 카이딘이 번역 감수한 이 책을 사서 읽었다.


나는 공중전의 에이스가 쓴 회고록이라면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어지간한 것들은 다 읽어 보았지만 그가 별로 호감 안가는 일본군의
조종사라는 사실만 빼놓고는 이 책만큼 흥미진진한 에이스의 일대기는
처음 보았다.


사카이 사부로가 개전 첫 날 대만에서 출격하여 필리핀의 클라크 기지를 공격했던 전투담이라던가 폭풍우 속을, 그 것도 파도를 기체에 맞아 가는 아슬아슬한 해면 비행으로 그의 편대원들을 안전하게 귀환 시킨 사실등의 개전 초반 이야기부터 땀을 쥐게 했다.


일본 해군 제로 전투기


그는 제로 전투기가 무장한 20밀리 에리콘 포로 단 두 발로 미군 P-39를
격추시킨 것,월남 전때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 중령이

타고 전선 시찰을 나온 B-25 폭격기를 기총소사로 거의 격추
시킨 전투는 정말 특기할만한 일이다.


아직도 반일 감정이 대단했던 나는 서너 번 읽은 그의 책에서

한 가지 조금 독특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카이에게 격추당한 연합국 전투기나 폭격기가 대단히 많았다.

바다나 육지에서 그는 기회가 되면 비상 탈출한 조종사 위를
선회 비행하며 자세히 그 상황을 기술 한 것이 대 여섯 번이나 나온다.


그의 제로 전투기에게 쫓기고 쫓기다가 지상 30미터 상공에서 파괴
되지도 않은 전투기에서 비상 탈출한 미군 전투기 조종사가
죽지 않고 지상에 안착하여 근처 밀림으로 죽어라하고 도망치는 꼴을
그저 지켜만 본 사실이라던가,  또 사카이에게 피격되어 비상 탈출하여 바다에 표류하던 한 B-17폭격기 대머리 승무원위 상공에서 머물면서 상어에게 잡아 먹히는  광경을 지켜보던 안타까운 심정을 표시하는 것등은 그가 쉽게 처치할 대상을 그냥 놔뒀다는 것을 말해준다.



라에 주둔 일본 해군 대남 항공대 소속 제로 전투기.

사카이가 탔던 전투기를 정확히 그린 것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 때의 잔인한 일본군의 만행을 잘 알던

나는 이런 손쉬운 처형(?)대상이 눈앞에 있는데 왜 그는 그대로 보기만

하고 놔두는가 하는 것이었다.


적 조종사들은 살아 돌아가면 다시 전투기를 몰고 나와서 아군기를
해친다는 이유가 전쟁 중 많은 조종사들로 하여금 격추된 조종사를
사살하는 비인간적인 짓을 정당화해주는 구실꺼리를 만들게 하였다.

이런 비인간적인 짓은 비교적 인권을 존중한다는 미군 조종사들도
그렇게 할 기회만 있으면 다반사로 해댔다.


그래서 나는 사카이가 그의 자서전에서 잔학 행위를 한 것을
감추었다고
보기도 했다.

그는 학생 때도 주먹을 쓰는 불량 학생이었지만 군에서도
그의 부하들에게 대단한 폭군으로 군림했었다.

정신 수양을 한다 해도 그런 타고 난 공격성은 전투의 뜨거운 열기에서는 자칫 잔악성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책을 몇 번 읽어 가면서 한 가지 느낌이 가슴속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가 미군들에게 잔악행위를 하지 않은 한 계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사카이는 개전 얼마 뒤 한 사진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의 진주만 공격 때였다.

미군 공군기지를 공격하던 제로 전투기가 대공 사격에 피격되어

조종 불능 상태에 빠졌다.

조종사는 제로 전투기의 기수를 미군 격납고로 돌리고 그대로

돌진하여 격납고를 부수고 자신도 죽었다.

이 장면은 오래된 전쟁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그대로
재현 되어있다.


미군은 죽은 일본인 조종사를 군인의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나도 이 사진을 본 바가 있는데 산기슭에서 일개 분대의 장례 의장대가

조총(弔銃)발사까지 하는 정중한 장례식이었다.

기습을 당해서 약이 오를대로 올랐을 미군이 저럴 필요가 있었을까
했지만  하여튼
미군들의 기사도가 유별나게 돋보이는 사진이었다.


사카이는 이 사진을 보고 크게 감동한 사실을 그의 저서에서
서술 해놓았다.

나는 이 사진이 그의 신사도를 발동하게 만든 것으로 추측했다..

이 발견을 계기로 나는 여기서부터 그의 내면 세계를 여러 각도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더 추가적으로 내가 발견했던 그의 정신적 토대가 있었다.

나는 그의 휴머니즘이 원래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로부터 크게 교육받은 생명 존중의 부처님의 말씀 때문이기도
했다고 봤다.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야규우 세끼슈사이가 수련의 극치에 올라 불살(不殺)의 검(劒)이라는 검의 철학을 완성했듯이 사카이는
검을 잘 썼지만 검으로서 상대방을 베이는 것은 상당히 자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의 휴머니즘이 보이는 한 공중전 동영상을 보자.

실제로 촬영한 것이 아니고 컴퓨터 그래픽이지만 대단히 섬세하게

제작되어서 실물 못지않다.

사카이나 서더랜드가 거의 꼭 같은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일식 육상 공격기 (一式 陸上 攻擊機)


사카이는 1942년  8월 7일 뉴 기니아 라에 해군 항공대 기지에서
왕복 10시간이나 걸리는 과달카날 출격에 나섰다.

과달카날을 침공한 미 해군 함대를 폭격하러 가는 일식 육상 공격기의

호위 비행이 임무였다.
그날 출격에 사사이 주이치로(50기 격추- 전사)와

니시자와 히로요시(102기 격추 - 전사)가 동행했다.


그들은 호위 비행의 임무를 마치자 미군 해군 전투기
F4F 와일드 캣 기와
격전을 벌린다.


F4F 와일드 켓

그가 처음 만나는 미 해군기였다.

그는 미 육군 항공대들의 조종사들보다 기술이 한 수 위인

미 해군 조종사의 실력에 놀란다.


그는 일본기들에게 집요하게 덤벼드는 한 미 해군기를 발견하고
결투를 벌린다.

미 항모 사라토가에서 발진한 미 해군의 베테란 조종사 제임스 ‘퍼그’ 서덜랜드가 그 전투기의 조종사였다.

치열한 공중전 끝에 격심한 G에 걸려서 탈진 상태인 서덜랜드의 후미를

잡은 사카이는 기관포로 그 전투기의 엔진 부분을 쏘아서 격추시킨다.


서더랜드는 비상 탈출해서 과달카날 정글에 안착했다.

사카이가 서덜랜드의 조종석을 쏘지 않고 엔진 부분을 쏘는 것이

이 동영상의 포인트이다.


전투 장면에서 사카이의 인간성의 한 면모가 보인다.

조종석 강타는 공중전에서 항시 애용하는 전법이었다.

파괴하기 어려운 기계보다도 조종사가 확실한 파괴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투기들이 조종석 방탄 장치가 되어서 직접 뚫리지는 않지만 엔진을 쏠 수있는 위치라면
조종석의 전방 케노피를 쏠 수있었다.
조종석 어디라도 맞으면 제로 전투기의  20밀리 기관포탄은
폭발하므로 상황을 일찍 끝 낼 수 있다.


그러나 사카이는 일부러 앞 엔진 부분을 쐈던 것이다.

여기에 보면 사격하기 전 녹초가 된 서더랜드와 수평 비행을 하며
서더랜드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 보았던 것이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Image:Lentaja.jpg

사카이 사부로

이 동영상을 보시면서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이 글과 약간 벗어난
세 가지의 논외적인 사실에 유의 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하나는 제로 전투기의 사카이가 동료 조종사들과 수신호로
연락하는 점이다

그 때의 일본 전자 기술은 형편없었던 터라 전투기나 공격기에 실은
무전기의 보이스 통화가 불능 할 정도라서 거지만 일본 전투기들이
무전기를 장비하지도 않았고 있어도 쓰지 않았다.


두 번째 그가 낙하산을 착용하지 않은 점이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상부의 빈번한 지시로 낙하산 착용을 강조했었지만 베테랑 조종사들은 조종에 방해도 되고 불편하다고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자신들의 실력과 제로 전투기의 성능을 믿어서 였을 것이다.


나중에 격추된 일본 전투기에서 낙하산을 메지 않은 조종사들이
발견되자
연합국측은 일본 측이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런
비인간적인 지시를 했다고 선전 했으나 사실과는 다르다.


세 번째다.

사카이가 목에 두른 비단 스카프를 유의해주시기 바란다.

이 스카프가 이날 사카이의 목숨을 구해줬다.

다음에 설명한다. 

 

사카이에게 격추되고도 목숨을 건진 서더랜드 대위는 그 뒤
구출되어 자대에 복귀했다.

종전 때까지 태평양 전선을 전전하며 조종사로서 일본군과 싸웠다.


종전 시 그의 기록은 다섯 기 격추, 미 해군의 에이스(다섯 기 이상 격추한 조종사에게 주는 칭호)가 되었다.

유감스럽게 그는 1949년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였다.

트집 잡는 시각으로 보자면 사카이의 아량이 동료 일본 조종사의

추가 피해를 가져 왔다고도 할 수 있다.


동영상에서 보듯 죽느냐 죽이느냐의 뜨거운 전투 열기 속에서도 

사카이는 인간미 있는 여린 마음을 보인다.

아무 저항력 없는 포로의 목이나 베는 일본 육군 군인들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사카이는 만년에 전쟁 중에 그의 진짜 신사적인 면모를 담은
한 사건을
술회하였다.


개전 초기 1940년 12월 일본군의 항공대가 필리핀 상공을 휩쓸고
다닐 때 사카이는 필리핀에서 도주해 나가는 미 군용 DC-3기를
발견하였다.


격추시키기 위해서 접근한 사카이는 비행기 창문을 통해서

손을 모으고 간절히 기도하는 금발의 서양 여자가 보았다.

비행기 안에서는 저승 사자가 찾아 온 것을 알고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런 공포 분위기에서 다른 창문에서는 천지난만하게 그를
내다보는
서양 어린이도 보였다.


그 때 일본 해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한 기라도 더 격추시켜
전과를 올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는 판에 그 커다란 적기는
먹음직한 먹이였다.


그러나 사카이는 차마 쏠 수가 없었다.

그 수송기를 공격을 하지 않고 그는 그대로 기수를  돌렸다.


안에 민간인이 있건 말건 그것은 적의 군용기였기 때문에 적기를
그냥
보냈다는 것은 일본군 체제에서는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이 사실을 오랫동안 비밀로 해두었다가 세월이 흘러가서 세상이

한참 바꾼 뒤에야 술회했다.


그는 앞의 동영상에서와 같이 서더랜드 대위를 격추한 뒤 후방에
기관총이 달린 공격기 편대를 전투기편대로 잘못 알고 공격했다가
지근거리에서
머리에 기총 탄을 맞았다.


머리 두개골이 관통 당한 부상으로 온몸의 반이 마비됐고 한때 시력은 겨우 태양빛만 구분할 정도의 중상을 입었지만 그는 기적같이 피투성이의 제로기를 홀로 몰고 다섯 시간을 날아 기지로 생환하였다.

이 일화는 인류 공중전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적 서사시로 꼽힌다.

(이 실화를 조만간 울프 독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동영상에서 보는 비단 마후라는 그가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머리의 지혈 도구로 썼기 때문에 그를 구해준 생명의 도구라 할 만하다.


사카이는 생환 후 병원에 2년 넘게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한쪽 눈의 시력을 영원히 상실하여 애꾸눈이 되었다.

그는 그런 몸으로 다시 현업을 복귀하여 유황도 전투와 본토 방공전에서 적기 4기를 더 격추하여 그의 총 격추기 숫자를 64기로 늘렸다.


종전 후 패전국의 전쟁 영웅들이 그랬듯이 사카이는 불구의 몸을

이끌고 살았던 길은 험난했다.


7년간 그는 도로 공사판이나 여러 건축 현장에서 노동을 하며
빈곤한
삶과 싸워야 했고 병에 걸린 아내를 잃어야 했다.


나중에 인쇄소를 차려서 다시 삶은 안정을 찾았지만

내면의 정신세계에 불교의 영향이 강했던 사카이는 전후
격심한 삶의 고통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인생의 회한(悔恨)을 느꼈다.

그는 평생을 전투 중에 자기 손에 의해서 희생된 영혼들의

명복을 빌며 살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일체의 살생(殺生), 심지어 파리나 모기 같은 미물도 죽이지
않는 불살(不殺)의 계명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한국에도 왔다 간 일이 있었던 사카이는 2002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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